웨이퍼 생산 능력으로 본 반도체 시장의 진짜 강자들
반도체 시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TSMC의 3나노, 5나노 같은 최첨단 공정에만 주목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웨이퍼 생산 능력(캐파시티)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삼성, 마이크론,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3사가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삼성은 월간 웨이퍼 생산량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의 특성 때문이다. 메모리는 대량 생산이 핵심이고, 웨이퍼 하나에서 나오는 칩의 개수도 많다. 따라서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업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모리의 진화: 단순한 저장장치에서 AI의 핵심으로
메모리 반도체는 크게 DRAM과 플래시 메모리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DRAM은 다시 여러 종류로 세분화된다:
DDR 메모리: 우리가 PC에서 흔히 보는 '램'이다. CPU가 필요한 데이터를 빠르게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메모리 역할을 한다. 마치 책상 위의 작업 공간과 같다고 보면 된다.
GDDR 메모리: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메모리다. 개별 데이터의 빠른 응답보다는 한 번에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게임이나 3D 모델링 같은 대용량 그래픽 처리에 최적화되어 있다.
LPDDR 메모리: 저전력으로 설계된 메모리로, 주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사용된다. 배터리 수명을 늘리면서도 성능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메모리가 등장했다. 바로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HBM: 메모리 시장의 게임 체인저
HBM은 기존 메모리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얇은 DRAM 여러 개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TSV(Through Silicon Via)라는 관통 전극으로 연결한다. 마치 고층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쌓아서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HBM이 GPU와 2.5D 패키징으로 옆에 바로 붙어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납땜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객사와 협업해서 정교하게 설계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실리콘 인터포저를 이용해 극도로 미세하고 촘촘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기존의 '만들어서 팔기' 방식이 아닌 '맞춤형 협업' 방식으로 사업 모델이 바뀌었다.
DDR4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패러다임
최근 메모리 시장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삼성이 2025년 후반기에 DDR4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고, 심지어 중국의 CXMT조차 DDR4 생산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신제품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메모리 시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DDR4에서 DDR5로 넘어갈 때, 생산 능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마이크론이나 SK하이닉스가 먼저 구형 제품을 단종시키고, 생산 능력이 큰 삼성이 마지막까지 DDR4를 생산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업체가 동시에 DDR4를 포기하고 있다.
왜일까? 답은 HBM의 수익성에 있다. HBM의 부가가치가 워낙 높아서, 기존의 레거시 메모리를 대량 생산하는 것보다 HBM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HBM 독주와 시장 지배력
2024년 기준으로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무려 95%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거의 독점에 가까운 수준이다. 특히 엔비디아에 HBM을 전량 공급하면서 DRAM 시장에서 삼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HBM 시장 자체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2022년에는 전체 DRAM 시장에서 2.6%에 불과했던 HBM이 2023년에는 급성장하더니, 2024년에는 20%까지 올라갔다. 이는 AI 붐과 함께 데이터센터용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실적을 보면 이런 변화가 더욱 명확해진다. 2023년 메모리 시장이 전반적으로 어려웠을 때도 HBM 덕분에 빠르게 회복했고, 2024년에는 2018년 역대 최고 실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심지어 2025년에는 더욱 높은 수익을 예상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메모리 산업의 새로운 경쟁 구도
이런 변화는 메모리 산업의 경쟁 구도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생산 능력(캐파시티)을 늘려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고객사와의 협업 능력과 기술력이 더 중요해졌다. 마치 TSMC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성공한 것처럼, 메모리 업체들도 단순한 제조업체에서 기술 파트너로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삼성은 여전히 전체 반도체 매출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HBM에서 앞서가는 SK하이닉스가 언제든 1위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마이크론도 HBM3E에 집중하면서 추격에 나서고 있어, 앞으로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AI 시대, 메모리가 반도체의 중심이 되다
결국 현재 상황을 종합해보면, 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메모리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AI 모델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HBM은 AI 가속기와 함께 사용되면서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GPU가 AI 붐을 이끌고 있다면, 그 GPU의 성능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HBM이다. 따라서 HBM을 잘 만드는 회사가 결국 AI 시대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단순한 대량 생산 경쟁에서 고부가가치 기술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DDR4 시대의 종말은 단순한 세대 교체가 아니라, 메모리 산업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상징한다. 앞으로는 HBM과 같은 차세대 메모리 기술을 얼마나 잘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느냐가 메모리 업체들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중심에서 한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가 글로벌 경쟁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