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경제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주목받는 키워드는 바로 '유동성'이다. 연준의 금리 정책과 정부의 재정 정책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새롭게 선택한 전략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유동성 공급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유동성이 자산시장의 핵심이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유동성이다. 기업의 펀더멘털도 중요하고, 연준의 금리 정책도 중요하지만, 결국 자산 가격은 시중에 돈이 얼마나 풀려있느냐에 따라 움직인다.
정부와 연준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연준은 없는 돈을 찍어내서 시장에 뿌릴 수 있다. 반면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시중의 기존 자금을 끌어다가 용도를 바꿔 뿌리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잠자는 돈을 깨워서 필요한 곳에 투입하는 셈이다.
2023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적극적 개입
2023년부터 미국 정부는 경기 사이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연준이 금리를 올려 경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정부는 오히려 막대한 유동성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이때 정부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단기국채 발행 비중을 대폭 늘리는 것이었다.
원래 단기국채는 전체 국채에서 15-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2023년부터 이 비중이 22-24%까지 올라갔다. 단기국채는 장기국채보다 현금에 가깝고, 담보로 활용되기 때문에 레버리지 효과가 크다. 즉, 같은 금액이라도 더 강력한 유동성 공급 효과를 낼 수 있다.
역레포 자금을 활용한 묘수
그런데 단기국채를 대량 발행하려면 이를 사줄 수요처가 있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주목한 것이 바로 연준의 역레포(역환매조건부채권Reverse Repurchase Agreement) 계좌에 쌓여있던 2조 달러였다.
머니마켓펀드(MMF)들이 리스크를 피해 역레포에 자금을 맡겨두고 있었는데, 정부는 단기국채 금리를 역레포 금리보다 약간 높게 설정해서 이 자금을 끌어왔다. 1년 반 동안 2조 달러가 모두 빠져나가면서, 그만큼의 단기국채가 발행되었고, 정부는 이 자금을 현금으로 확보해 시장에 뿌릴 수 있었다.
스테이블코인, 새로운 유동성 공급 수단
하지만 역레포 자금이 바닥나면서 미국은 새로운 수요처를 찾아야 했다. 그 해답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현재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이 3개월 이하 단기국채만 보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누군가 1달러를 내고 스테이블코인을 사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업체는 그 1달러로 미국 국채를 산다. 스테이블코인 보유자는 회사를 믿는 게 아니라 국채라는 담보를 믿는 셈이다. 이는 MMF와 유사한 구조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MMF는 금리에 민감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이자를 주지 않기 때문에 금리 변동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따라서 연준이 금리를 내려도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유지될 수 있어, 정부 입장에서는 더 안정적인 국채 수요처가 되는 것이다.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의 상호작용
미국이 비트코인 ETF를 승인한 이유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가상화폐 시장에 참여하게 되고, 이들은 거래를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게 된다. 비트코인이 1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오르면, 같은 비트코인을 팔아서 만들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도 100배 늘어난다.
즉, 가상자산 시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스테이블코인 수요도 늘어나고, 이는 곧 미국 국채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규모를 현재 2000-3000억 달러에서 2조 달러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글로벌 유동성 전쟁의 시작
이는 사실상 글로벌 유동성 전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에 확산되면, 각국 은행에 예치된 자금이 미국으로 유입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해외 자금을 끌어와 국채 수요를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등을 추진하는 이유도 이런 유동성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러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장기 전략: 국가 주도 산업 육성
이런 유동성 확보 전략의 배경에는 미국의 장기적인 산업 정책이 있다. 미국은 현재 국가 주도로 AI, 빅테크, 원자력, 데이터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이는 과거 산업혁명이나 IT 혁명 때와 유사한 패턴이다.
정부가 확보한 자금은 이런 전략 산업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 중소기업에 골고루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미래 성장동력이 될 특정 분야에 선택과 집중하는 전략이다.
새로운 경기 사이클의 등장
과거 30년간 우리가 경험한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사이클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저렴한 제조업 덕분에 가능했던 이 사이클은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앞으로는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성장' 사이클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경기에 적극 개입하면서 연준이 만들어내던 기존의 장기 사이클보다 더 빠르고 변동성이 큰 사이클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투자 관점에서의 시사점
이런 변화는 투자 전략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스테이블코인 규모가 늘어날수록 미국으로 유동성이 유입되고, 이는 미국 주식시장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목 성장률이 높아지는 환경에서는 원자재 투자도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처럼 원자재가 포트폴리오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위험 요소들
물론 이 시나리오가 순탄하게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올 여름 예상되는 부채한도 협상이다. 협상이 타결되면 정부가 대량의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이때 단기적으로 유동성이 흡수되면서 시장에 변동성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하거나, 단기국채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동성이 발생할 위험도 있다.
미국의 이런 전략이 성공할지는 결국 시장이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과거 위기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이런 거시적 흐름을 이해하고, 스테이블코인과 유동성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